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양반집 상놈집 가리지 않고 집집마다 호전(戶錢)이란 것을 받았다. 그러므로 마을에서 걷히는 호전의 액수로 미루어 마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895년에 저술된 <<기전읍지>> <시흥현읍지여사례성책, 사례(事例)>를 보면 지금은 양평동이 된 양평리(楊坪里), 지금은 당산동이 된 당산리(堂山里), 지금은 신길동의 일부가 된 상방하곶리(上方下串里), 지금은 영등포동의 일부가 된 하방하곶리(下方下串里)에서 걷힌 호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양평리 호전 36냥, 당산리 호전 4냥, 상방하곶리 호전 10냥, 하방하곶리 호전 2냥 5전 등 봄가을로 52냥 5전을 관가에서 받아 쓴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당시 양평리의 마을 규모는 당산리의 9배에 해당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의 책에 의하면 당시 시흥현(始興縣) 총호수는 1,640호(戶)였다. 이를 감안하고, 또 호전의 단위가 5전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미루어 매호당 5전의 호전을 냈다고 본다면 당시 양평리에는 72호가, 당산리에는 8호가 상방하곶리에는 20호가, 하방하곶리에는 5호가 살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양평리는 다른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던 셈이다. 양평리가 이렇게 큰 마을이었던 것은 그곳에 양화나루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