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사정이 있던 고사리(高寺里)라는 지명은 정말 오래된 지명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도 그렇게 불렀다. 조선 영조(英祖) 때 편찬된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전하는 1,400년대 후반에 지어진 <노한비명(盧?碑銘)>을 보면 고사리가 등장한다. <노한비명>은 노사신(盧思愼, 1427~1498)의 부탁으로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지은 노한(盧?, 1376~1443)의 묘비명(墓碑銘)으로 거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노한이 어머니 왕씨(王氏)의 상을 당하여 금천(衿川) 북면(北面) 고사리(高寺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왕씨가 돌아간 것은 세종 21(1439)년의 일이고, 그 때 노한의 나이는 64세였다. 한편 고사리는 우리말 지명 높은절이의 차자표기로 생각된다. 고(高)의 훈이 ‘높다.’이고, 사(寺)의 훈이 ‘절’이기 때문에 그렇게 차자되어 한자의 뜻 그대로 쓰였을 것이다. 높은절이는 높은절에서 연유하는 마을이름일 것이나 높은절이 절의 고유이름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서울특별시 동명연혁고>> <관악·동작구편>을 보면 높은절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현재 노량진동과 대방동, 상도동과 경계가 되는 노량진동 산(山) 10번지의 지대가 높은 곳에 청련암이란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마도 이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청련암이 지리서에 등장하기는 1899년 11월에 저술된 <<시흥군읍지(始興郡邑誌)>>가 처음인데 청련암(靑蓮庵)이라고 이름만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연원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으로 <<서울특별시 동명연혁고>> <관악·동작구편>을 보면 청련암의 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청련암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절이 하도 많아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하여튼 김수온이 지은 <노한비명>에 고사리라는 마을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꽤 오래된 절인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한편 <<한국지명총람>> <서울편>을 보면 청련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암자는 신라시대에 지은 것이라 전하나 상고할 수 없으며, 고로(古老)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선조대왕 때 옥계(玉溪)선생이라 불리던 노진(盧?)씨가 그 때 재상으로 있으면서 그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지은 것인데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불이 났는데 석가존상만은 엄연히 화를 면한 바 있어 그 절 화상이 분발하여 다시 모금하여 중건 중수하고, 그 뒤에 석가 약사 아미타불 세 존상을 중수하고 6·25 때 일부가 폭격을 당하여 다시 중수하였다고 한다. 노진(盧?, 1518~1578)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이 풍천(豊川)이고, 자가 자응(子膺)이며, 호는 옥계(玉溪)이고, 시호가 문효(文孝)이다.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인 노숙동(盧叔仝, 1403~1463)의 후손으로 경상도(慶尙道) 함양(咸陽)사람이다. 명종 1(154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등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구요, 저서로 <<옥계문집(玉溪文集)>>이 있다. 그러나 <<한국지명총람>>에서 이른바 고로들이 전한다는 옥계 노진의 이야기는 노한(盧?)의 조부(祖父) 노진(盧?, ?~?)의 이야기와 노한의 이야기, 옥계 노진의 이야기가 서로 섞이면서 와전되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옥계 노진의 이야기를 그렇게 보는 것은 옥계 노진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지어진 <노한비명>에 고사리가 등장하는데다가 <<국조인물고>>에 전하는 조선 인조(仁祖) 때의 문신인 이정귀(李廷龜, 1564~1635)가 지은 <노진비명(盧?碑銘)>만을 보더라도 옥계 노진은 금천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을뿐더러 노한의 조부인 노진과 노한이야 말로 고사리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사리에 노한의 선영(先塋)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한이 세종 19(1437)년 우의정으로 있다가 파직당한 후 우거한 곳이 바로 고사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지도서>>를 보면 노한을 금천현 출신의 명환(名宦)으로 꼽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의정(右議政) 노한은 자가 유린(有隣)이고, 시호는 공숙(恭肅)이며,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나이 여남은살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어머니 왕(王)씨를 모시고 금천현 고사리(古寺里)에 와서 우거(寓居)하였다. 우거란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것을 일컫는 말다. 어쨌거나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노한의 조부 노진(盧?)의 이야기가 이름의 소리가 같다는 점 때문에 옥계 노진(盧?)에게로 옮겨가고, 노한의 효사정에 대한 이야기가 청련암으로 옮겨가는 등의 과정을 거쳐 급기야는 옥계 노진의 청련암 이야기가 생겨났다고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